우공이산(愚公移山)을 이룩한 “미라클보이스앙상블”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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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우공이산(愚公移山)을 이룩한 “미라클보이스앙상블” Ⅰ

*9명의 발달장애인이 사건을 만들다.
*국내는 물론, 세계최초의 발달장애인 성악공연단.
*금년10월 31일 미국 카네기홀 무대에 서다.

 

기적의 씨앗은 긍정이라는 올곧은 신념으로 기적을 이룬 이은형씨.대한사회복지신문.jpg

 

“같은 또래에 비하여 신체적또는정신적인 발달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 이는발달장애인의 사전적 의미이다.특히, 대한민국에서는, 행정용어를 겸한 보통명사로 간단히 가름 된다.

용어 그대로, 지적, 신체적 발달이 더딘 자녀를 둔 부모나 그 가정 내의 숨은 사연들은 오롯이 그들만의 절대 몫으로 남겨두거나 짐을 지운채로, 세상 사람들은 각자의 주어진 삶에만 혼신을 다하며 여념 없이 살아가고 있다.

여기까지가 비장애인들이 갖는 일반적인 관념이다.

장애인, 비장애인을 차치하고 공동체 구성원으로써의 의무감을 기대하는 일은 어불성설이며 이들에게 있어서 오히려 반칙이다.

이는,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의 장애인을 대하는 엄연한 현실이다.

물론, 이에 대한 나름의 발달장애인 지원법이 엄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발달장애인 권리 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이 2014년에 제정되었고 이듬해인 2015년에 시행되었다.

한 걸음 다가가 보면, 장애 당사자 생애주기를 고려한 복지 욕구에 적합한 지원과 권리 옹호를 위한 보호법들이 체계적으로 촘촘하게 제정되어 있긴 하다.

다소 원론적이긴 하지만, 그나마 선진국 대열에 다가가려는 정부의 노력 흔적은 엿보인다.

그렇지만, 이러한 지원법이 발달장애 아동을 가진 부모와 가족 구성원들이 겪어 내야 하는 처절한 애환들을 어루만지기에는 질량을 따져서 턱없이 부족한 제도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여, 앞서 적시된, 지원법 운용이나 시행은 국가가 맡아서 할 몫이다.

하지만, 나머지 모든 상황들은 부모와 가족 구성원들의 중한 책무인 것이다.

그 가운데 부모의 역할이야말로, 신의 경지에 다다를 만큼 절대적이어야 하며 헌, 혼신을 요구한다고 하겠다.

일반인이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을 만큼의 고통과 눈물을 동반자 삼아야 할 만큼 괴롭고, 절망스럽고, 고독한 시간들을, 희망과 즐거움으로 치환시켜야 하는 내공 깊은 철학자가 되어야 했고. 가끔씩은 성직을 수행하는 자세로 살아야만 했다는 말이다.

이쯤에서,“미라클보이스앙상블이라는 발달장애인 초유의 남, , 또는, , 남 혼성 성악공연단을 이끌고 있는 정연재 단장의 어머니 이은형(61)씨를 자랑의 무대에 소개해 보려고 한다.

미라클보이스앙상블이란, 윤혁진 예술 감독(계명대학교 음대, 동 대학원 졸업)과 김은정(계명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 졸업) 음악감독의 지도 아래 정연재 단장을 필두로 아홉 명의 발달장애를 가진 성악가로 꾸며진 공연단을 이르는 이름이다.

이름 그대로 기적의 성악 앙상블 공연팀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경이로운 공연단이다.

실제, 2017부터 2023년까지 수십여 회, 크고 작은 순회공연을 가질 만큼 화려한 공연 이력의 이면에는 숨은 주역 이은형 씨를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

현재, 이처럼 안정감 있는 기반을 만들어 준 공연단 산모이신 이은형 씨를 모시고 발달장애인을 자녀로 둔 부모와 그 가족들의 희로애락이 점철된 숨은 사연들을 알아보기로 한다. 

 

묵묵히 산을 옮긴우공이산의 주인공 이은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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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남 기자~먼저, 직장 일과 공연단 업무만 해도 분망하실 텐데도 이렇게 귀한 시간을 내주시어 본지와의 대담에 응해주신 점, ()를 대표해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번 기획물에 대한 본보 편집 방향은, 미라클보이스앙상블의 성공담이 우선이 아니라,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부모의 열정적인 교육관에 의해 얼마든지 사회공동체 주체로써 설 수 있다는 경이로운 현상을 본지 독자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장애인을 특수블록에 거()하는 대상쯤으로 여기면서, 국가가 베푸는 수혜들이 곧 장애인 복지형태의 한 가닥 정도로 인식된 사회적 분위기에 인식 전환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최소한의 시도라고 보시면 될 것입니다.

물론, 그동안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미라클보이스앙상블"의 궤적들은, "기적"이라는 명사에 걸 맞는 경이로운 일들을 해낸 것입니다. 진정, 존경스럽고, 이에 찬사의 박수를 아낌없이 보내드립니다.

안 그래도 바쁘실 테니까 몇 가지 간추려서 여쭈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보스톤치과 실장으로 되어 있는 직함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이은형 실장~먼저, 답변을 하기 전에. 멀리가려면 함께 가야한다는 말이 있듯이, 미라클의 탄생배경이나 취자가 이와 같아야 한다는 말씀을 전제하고 질문에 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질문하신 직함을 밝히자니 다소 쑥스럽습니다만, 굳이 물어봐 주시니 답변을 드리겠습니다.보스톤치과 실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게 된 이유는, 사실 보스톤치과는 구리시 롯데 백화점 옆 동원빌딩 7층에 있는, 저희 아이들 아빠인 정성화 원장이 대표원장으로 있는 치과 병원입니다. 그러다 보니, 내원 환자들에게, 진료나 치료, 또는, 시술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제공하는 직무를 맡아 하는 자리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무어, 병원과 환자 간에 소통 창구라고나 할까요?

 

기자~제가 알기로는, 보스톤치과에서는 장애인 환자들에게 치료비 할인 혜택을 주고 있다고 하던데요 사실인가요?

 

실장~모든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고요, 발달장애인에 국한해서 비보험 20%를 적용해드리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 발달장애인분이 지인의 소개로 저희 치과에 내원하셨는데 그동안 치아가 빠졌는데도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치아를 휴지에 싸서 들고 다니셨다고 합니다. 발달장애아를 둔 엄마의 입장에서 이 사실을 전해들은 저는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우리 연재는 머리 한번 자르려고 해도 두 사람씩 붙들고 야단법석을 치루는데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 내용을 치과 가족들에게 전했습니다.

이런 사연들을 충분히 알고 있던 치과가족들은 세 차례 내원하여 임플란트 시술을 마칠 때까지 정성을 다해서 돌보아 드렸습니다.

후일, 그 가족분께서 이 사연을 블로그에 게재하여 저희 보스톤치과의 친절함에 대해서 소개해 주셨더라고요.

이후, 봉사의 유형 중에 우리 치과에서도 충분히 봉사가 가능하다는 의견을 모아 그 이후부터 장애인에 대해서 20% 특별혜택을 드리는 새로운 버전의 봉사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기자~발달장애인을 특정하시는 이유라도 있으신지?

 

실장~앞서 질문의 답변 중에 언급했다시피 사실은, 저희 둘째 아이인 연재가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동병상련이라고 할까요? 발달장애아를 두신 부모님들의 애로와 노고를 너무 잘 아는 저희로써 그분들에게 다소나마 도움을 드린다는 의미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물로, 서울장애인부모연대 광진지회, 광진발달장애인가족지원센터, 구리시 장애인종합복지관, 구리시발달장애인평생교육센터 등과 양해각서(MOU)를 교환하고 현재, 치료현장에 반영하고 있는 중입니다.기자~발달장애아 자녀를 두신 부모님들의 삶이 그리 녹녹치 않으실 텐데요.실장~처음, 우리 연재가 발달장애아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저희 부부는 멘붕 그 자체였습니다. 하늘이 내려앉는 느낌이었고 세상 모든 것이 다 싫어졌습니다.

급기야는 우울 증상이 발현되기까지 했었지요. 적지 않은 기간, 그렇게 무망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 서서히 마음을 다잡기 시작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아이를 위해서라도 어찌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내가 무너지면 우리 연재는, , 우리 가족은 어찌되는가? 라는 생각이 들자 정신이 번쩍 들었지요.

우선, 우리 연재가 발달장애를 가진 이유가, 세상 어느 누구의 탓이거나 잘못도 아니라는 자각이 왔습니다. 또한, 인간에게 있어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이고, , 어디에 있을까 라는 자문자답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중복장애를 가졌던 헬렌켈러의 전기를 찾아 읽게 되었고, 자식의 교육을 위해서 묘지에서 시장으로 시장에서 서당 부근으로 세 번씩 이사를 했다는 맹모삼천지교에 관한 서적, 기호학파 태두인 율곡의 모친인 신사임당 일대기까지 섭렵하면서 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에도 전, 이수성 총리의 모친이신 강금복 여사님에 관한 자료를 보면서 이분들이 보여준 자녀교육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에 비하면 나는 아직 멀었구나 하는 자기반성을 하게 됩니다.

조금 다른 얘기인데요, 우리 연재가 생후 15개월부터 한글과 영어는 물론이고, 숫자와 카드까지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전 천재를 낳았구나 하고 그만 하늘을 날 듯이 기뻐했고 감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영특할 것만 같던 아이가 28개월이 되어도 말을 하지 않고,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등, 이상행동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어느 날, 음식점에 갔을 때인데, 음식점 앞에서 안 들어오겠다며 고집을 피우는 아이에게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냐며 흔들었는데 아이가 그것을 뿌리치다가 길바닥 작은 돌부리에 넘어져서 머리를 다쳐서 그 상처에 두 바늘을 꿰맨 일이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우리 아이가 자폐성 장애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당시로서는 그 사실들이 저나 가족들에게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지요. 천재가 태어났다고 그리 좋아하던 가족들에게는 우리 연재가 자폐성장애아라는 사실자체가 쉽게 수긍되거나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희 가정에는 웃음이 사라졌습니다. 모두 암울한 표정의 말이 없어진 조용한 가족그 자체였습니다.

 

자폐성 장애아를 둔 가정생활.

 

잠시라도 관심에서 벗어나게 되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돌발행동으로 인해 가족들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는 병증이 곧, 자폐성 장애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엄마인 저 외에 그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는 24시간을 아이의 교육과 인내심으로 버티고 버티다가 아이가 6살 때 쯤 되던 어느 날, 불현 듯 , 이대로라면 죽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장애아를 둔 엄마는 죽거나 사라지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고약한 자리인가 봅니다. 당시, 우연히 차창 밖을 보니 2월이라 한기가 남아 있는 겨울인데도 길가에 시멘트 바닥을 뚫고 나온 초록빛 잎사귀를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들었던 생각이, 아니, 명색이 이은형이가 한겨울, 저 강한 시멘트 사이를 뚫고서 생명의 잎을 틔운 길가의 풀잎보다 못하다는 말인가? 라는 자책감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열 달이나 고생해서 낳은 소중한 아이의 병증 때문에 힘들다고 생각해왔던 엄마라는 내 자신을 되돌아보고 너무나도 부끄러웠습니다.

신께서 살아내라고 주신 귀한 생명인 우리 연재를 위해서 저의 몸과 마음을 모두 바치기로 굳게 다짐도 했습니다.그 이후부터는, 지치고 힘든 상황을, 기쁘고 희망이 넘치는 상황으로 관념치환(觀念置換)해 버리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지긋지긋한 불행의 끈이 아직, 저와 우리 가족을 붙들고 놓아 주질 않고 있었습니다. 연재 10세 때에는, 희귀난치병으로 알려진 크론병이 새롭게 우리 아이에게 왔고 그로 인해서 불과 2주 만에 10kg이 빠졌습니다,

자폐를 앓고 있는 우리 연재로서는, 약이 뭔지, 왜 먹어야 하는지, 자신이 왜 이런 처치를 받아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어디가 아프다고 표현조차 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콧줄을 끼우다 안 되면 대신, 수면제를 먹인 상태에서 인턴 선생님들이 여린 아이의 사지를 흰 광목천으로 묶고서, 한 사람은 아이 배 위를 누르고, 두 사람은 아이 사지를 묶어가면서 억지로 콧줄을 끼우는 상황도 있었습니다.

그런 일들을 겪어야 하는 엄마인 저로서는 정말 감당하기에 너무나 어려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서울대학 병원에 2개월간 입원하여 염증을 가라앉힌 후, 지금은 2개월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주사를 맞으며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자폐와 희귀난치성인 크론병 등, 자신에게 무슨 병이 왔는지도 분별도 못하는 연재가 너무나 불쌍해서 크론병을 진단받은 날, 대학병원 계단에서 하나님께 저에게 더 고통을 주시려거든 얼마든지 더 줘보시라고 독백을 하면서 턱없는 오기도 부려보고 원망을 하며 통곡을 하고 있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한비야 작가의 벼랑 끝에 있는 나를 미셨지만, 나에게 날개가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라는 글 내용이 머릿속에 번뜩하고 스치는 겁니다.순간, 전신에 전율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 여태까지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절망의 시기에 저에게는 기적이나 같은 경험의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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