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9월 2일) 우리나라 남단 고흥(고향)에 다녀왔다. 선산을 둘러본 후 70이 넘은 집안 형님과 대화를 나누는데 동네에서 네번째로 젊다고 하여서 웃고 말았다. 젊은이는 찾아볼 수 없고 최연소 1명이40대중반, 60대가 2명 나머지 100여명은 모두 70대 이상이라 한다. 젊은이는 도시로 가고, 어린아아이들도 없는 동네가 마치 딴 세상처럼 이상하게만 느겨졌다. 이번주간에는 우리나라 명절중 하나인 한가위 추석명절이 들어있다. 가족을 찾아 서로만나며 고향을 방문한 사람도 많으리라. 나를 반겨줄 고향사람을 생각만해도 이 얼마나 정겹게 느껴지지 않는가?
“1980년 3월, 프랑스 파리의 부르셀 병원에 한 세기를 떠들썩하게 했던 존경받는 지성인이 폐수종으로 입원해 있는 한 달 동안 문자 그대로 발악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지를 아내에게도 묻지 못했고 아내조차도 그의 병명을 말하지 못했다. 소리치며 괴로워하고 있는 남편 곁에서 위로조차 하지 못하고 지켜 보아야만 했던 이 불쌍한 여인과그 사람! 그런데 그 사람처럼 글로써 현대인에게 깊은 감동을 남긴 사람은 없었다. 바로 그가 한 세기에 가장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이다.
그의 말로는 참으로 비참했는데 1980년 4월 16일, 그는 입원한 지 한 달만에 병원에서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 ‘사르트르가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는가?’’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그의 말로가 비참했던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각 언론이 떠들기 시작했다. 그때 어떤 독자가 한 신문사에 이런 기사를 투고했다고 한다. “그는 아마도 비그리도인이었는지모른다. 사르트르의 말로가 그렇게도 비참했던 이유는 그에게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그렇다. 그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었다. 고향! 아버지 어머니 불러본다, 언젠가 돌아갈 영원한 내고향은 하늘나라이다. 고향 추석명절 복된 만남이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