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탕밥 한 그릇과 불인지심(不忍之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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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칼럼

잡탕밥 한 그릇과 불인지심(不忍之心)

연세대.
국립합창단.
뉴욕주립대 박사
챔버코럴 상임지휘자

잡탕밥 한 그릇과 불인지심(不忍之心)

 

거의 오십 년이 다 되어가는 오래 전의 일이다. 나는 중학교 입학식 때 혼자 갔다. 입학식이라 하여 대부분의 아이들은 엄마가 함께 와서 반을 배정 받고 각자의 반으로 가서 담임선생의 얼굴을 익히고 주의사항을 듣고 그 다음 날부터 등교를 하게 되는데 모든 일정이 끝나고 나면 얼추 점심시간이 된다. 나의 부모님은 아들 셋을 키우느라 허리가 휘어지는 빈곤의 서민이어서 막내아들 입학식에 참여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계획에 없었을 테고 나 또한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 여겨 그에 대하여 아무런 불만을 가져서는 안 될 처지였으나 한 편으로 엄마들이 찾아와 축하해주는 아이들이 부럽기도 하였다.

 

교실에서 나온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집으로 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을 터였다. 그때 !” 하고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나와 한 반인 듯한 조그만 아이와 그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여인이 나를 보고 있었다.

 

너 혼자 왔니?”

......”

너 우리랑 같이 점심 먹으러 가자

 

내가 그 순간에 망설였는지 혹은 사양했는지는 기억이 나진 않지만 나는 그 모자와 함께 중국음식점으로 갔다. 그 때까지 내가 먹어본 중국음식이라면 초등학교 오학년 때 친구 놈 둘하고 함께 도둑질 한 돈으로 사먹은 짜장면이 유일했다. 불의한 돈으로 사먹은 짜장면이라고 맛이 없을 리가 없다. 그 뒤로도 그 놈들하고 함께 어울려 못된 짓을 하고 다녔던 행위들이 내 기억 속에 희미한 흔적으로 남아있다. 그 아이들하고는 중학교 입학 이후에 아주 멀어졌다.

 

나를 중국음식점으로 데려간 친구의 엄마는 나와 친구에게 잡탕밥이란 요리를 시켜주었다. 갖가지 해물과 달짝지근한 소스가 어우러져 밥 위에 얹어진 그 기막힌 맛의 황홀한 기억은 지금까지 내 일생을 통하여 먹었던 어떤 음식보다 더 강렬하게 남아 있다. 세상에 어찌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기억을 되살리며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내 입에서는 침이 고이고 있다. 내 남은 삶 동안에 그런 맛을 단 한 번이라도 더 느껴볼 수 있을까. 친구의 엄마는 왜 생면부지의 나에게 밥을 사주었을까.

 

 

맹자(孟子)공손추편(公孫丑篇)()에 불인지심(不忍之心)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맹자가 제()나라에 머물렀을 때 혹독한 정치를 펼치는 군주들에게 권면하는 말로서 불인지심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왕이 차마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이 있으니 이에 차마 그냥 못 본 척할 수 없는 정사가 있다. 사람에게 차마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으로 그냥 못 본 척할 수 없는 정사를 행하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손바닥에서 움직이는 것과 같을 것이다“.

 

맹자는 사람에게 불인지심이 내재해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고대의 어진 왕들이 선정을 베푼 것도 불인지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보았다. 나아가 모름지기 인간이란 측은히 여기는 마음(측은지심:惻隱之心), 불의를 부끄러워하는 마음(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하는 마음(사양지심:辭讓之心),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시비지심:是非之心) 즉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며 이런 것들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라고 하였다.

 

우물에 들어가려는 어린 아이를 봤을 때 누구든지 달려가 구해주려고 하는 것은 아이의 부모에게 돈을 뜯어내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서도 아니다. 단지 구해주어야겠다는, 차마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 하나로 발현되는 자연스러운 행위 아닌가. 불인지심이란 그런 것이다.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고, 내가 한 잘못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기본 중의 기본인 것이다.

 

나에게 잡탕밥을 사주었던 친구의 엄마는 혼자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가는 내가 안쓰러웠을 테고 저 어린 것에게 밥 한 끼 사주어야겠다고 맘을 먹었을 것이다. 그 한 그릇을 돈으로 따진다면 몇 푼 되지 않을 소액이지만 그 착한 행동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한 사람의 일생을 인도하는 한 줄기 밝은 빛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기억은 내 양심의 거룩한 화인(火印)이 되어 내가 흔들릴 때마다 지금껏 나를 붙들어주었다.

 

나는 너무나 무지하고 인격적으로 흠결투성이에 고집불통의 편벽한 인간이지만,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서 약자의 편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려 노력했으며 내가 가진 어떤 것이라도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결코 내가 잘나서가 아니고 그렇게 해야 내가 평안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조건 없이 나에게 무조건적인 사랑과 배려를 베풀어 준 한 여인의 잡탕밥 한 그릇은 그토록 위대했던 것이다.

 

그 친구와는 지금 연락이 닿지 않아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 없다. 친구의 어머니가 지금 살아계신다면 팔십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옛 말에 원한은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는 말이 있다. 지금이라도 수소문하여 그 친구의 소재를 알아내야겠다. 만약에 어머니가 살아계신다면 찾아뵙고 큰 절을 올리고 싶다. 어찌 보면 내 인생의 가장 큰 스승이 아닌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혁명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이념도 아니다. 오로지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불인지심(不忍之心)의 발현이 온누리를 덮을 때 비로소 탐욕으로 가리워졌던 눈이 뜨이고 귀가 열려 사람을 살리고 지구를 살리는 대동세상(大同世上)으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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