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현상칼럼) 베토벤의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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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칼럼

(송현상칼럼) 베토벤의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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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국립합창단

뉴욕주립대학 박사

챔버코랄 상임지휘자

 

베토벤의 유서

 

아, 내가 증오에 차있고 꽉 막혔으며 사람들을 미워한다고 믿는 너희들, 너희들은 그 속에 감춰진 이유를 모른다. 6 년 째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데 무능한 의사들이 병을 더 악화시켰다는 것을 한 번 생각해보라. 열정적이고 활발한 성격으로 태어나서 사교계 생활을 즐기던 나는 일찍이 고립되어 세상에서 멀어진 채 외롭게 살아야만 했다. 아, 그 때마다 나는 내가 듣지 못한다는 끔찍한 경험을 얼마나 되풀이했던가. 아, 누구라도 완벽해야 할 감각, 이전의 나의 완벽한 상태, 지금까지 극소수의 음악가들만이 소유한 완벽한 감각의 악화를 어찌 고백할 수 있을까. 이 불행은 나를 이중으로 괴롭힌다. 왜냐하면 확실하게 이 것 때문에 내가 오해받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완전히 혹은 거의 혼자다.

 

나를 붙드는 것은 예술, 바로 그 것뿐이었다. 아, 나는 비참한, 진실로 비참한 이 목숨을 끌고 왔다. 그것은 ‘인내’였다. 나에게는 용기가 있다. 하느님, 당신은 인류애와 선을 행하고자 하는 갈망이 제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아, 사람들이여 내게 정당하지 않았음을 생각하시오. 또한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연이 내린 모든 장애에도 불구하고 예술가와 위인의 대열에 끼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던 사람을 보면서 위안을 삼기를......

 

자, 됐다. 나는 기꺼이 죽음 앞으로 나아간다. 죽음이 일찍 다가오더라도 나는 행복할 것이다. 죽음은 끝없는 고통에서 나를 놓아주지 않을까? 언제든 오라. 나는 용감하게 네 앞에 선다. 안녕, 내가 죽더라도 나를 완전히 잊지는 말아다오. 부디 행복하여라.

 

하일리겐슈타트에서, 1802년 10월 6일 루트비히 판 베토벤

 

추신:

이처럼 아주 침통하게 너희에게 작별을 고한다. 난 이제 완전히 희망을 포기해야겠다. 아, 하느님 제게 한 번만이라도 순수한 즐거움으로 가득 찬 날을 주십시오. 아, 하느님 제가 다시 자연과 인류의 성전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까요? 절대 안 된다고요? 안 됩니다. 그것은 너무나 가혹합니다.

 

하일리겐슈타트에서, 1802년 10월 6일 루트비히 판 베토벤

(나의 카를과 요한에게, 내가 죽은 후에 읽고 집행할 것)

 

서양음악의 역사에서 베토벤(1770. 2 ~ 1827. 3. 26)은 ‘음악의 성인’으로 불리운다. 자식을 모차르트처럼 유명해지기를 원했던 아버지에게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베토벤은 일찍부터 뛰어난 연주자로서 음악의 도시 비엔나에서 각광을 받는다. 피아노 연주자로서 또, 뛰어난 작곡가로서 승승장구하던 그는 25살이던 1795년 무렵부터 귀에 이상이 생겼다. 작곡가에게도 그렇지만 연주가에게 청력 이상은 치명적이다. 들리지 않는데 어떻게 연주할 수 있겠는가. 베토벤은 사람들 몰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좀처럼 차도가 보이지 않았고, 1802년 무렵에는 주변 사람들도 그의 병을 알아차렸다. 의사가 시골에서 요양하라고 한 것은 사실상 치료 방법이 없어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2003년부터 이듬해 초까지 우리나라 뿐 아니라 동남아 일대에 한류 열풍을 일으켰던 대하드라마 ≪대장금≫에서 대장금이 미각을 상실했을 때 ‘마음으로’ 맛을 보아 훌륭한 요리를 만들어 내었던 장면이 생각난다. 필자 또한 한참 야망에 불타있던 20대 후반에 ‘성대결절’이라는, 성악가로서는 치명적인 병을 얻어 아득한 절망감에 싸였던 아픈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얼치기 성악가였던 나도 앞이 캄캄했을 만큼 절망적이었는데 음악계에서 정상의 위치에 있었던 베토벤의 심정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점점 청력이 나빠지다 마침내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되자 그는 절망에 휩싸여 죽기를 결심하고 유서를 작성한다. 이 유서를 작성할 때 그의 나이는 불과 32살이었다. 하지만 절망의 끝에서 희망이 비로소 시작되듯 그는 거기서 좌절하지 않고 마지막 삶의 불꽃을 태우기 시작한다. 그 때부터 베토벤은 그가 가지고 있는 예술혼의 남은 한 방울까지 쥐어 짜내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음악사에 길이 남을 대작을 잇달아 발표해낸다. 1804년 3번 교향곡 ‘영웅’을 발표하고, 이듬해부터 피아노협주곡 4번과 4·5·6번 교향곡을 잇달아 발표한다. 6번 교향곡 ‘전원’을 구상하고 완성한 곳은 유서를 작성했던 하일리겐슈타트였다. 귓병은 여전했고 소리는 점점 그의 귀에서 사라져갔지만, 베토벤은 마음속에서 솟아나오는 선율을 묵묵히 오선지에 옮겼다.

 

이제 빈 사람들은 모두 그의 병을 알았고 베토벤도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1814년 그는 피아노 연주자로는 마지막으로 무대에 올랐다. 친구들과 피아노 트리오 7번 ‘대공’을 연주하는 무대였다. 그 무대 이후 5년쯤 지나자 베토벤은 종이에 글을 써서 의사소통을 해야 했다. 그의 마지막 교향곡 9번은 지금까지 만들어진 모든 교향곡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남만주의 시대의 대 작곡가 브람스는 더 이상의 교향곡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40살이 넘도록 교향곡을 작곡하지 않다가 44살이던 1876년에 첫 번째 교향곡을 발표하는데 그 걸 완성하는데 21년이나 걸릴 정도로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다. 그가 존경하는 선배 작곡가 베토벤을 그토록 의식하며 쓴 그의 작품은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계승한다 하여 ‘교향곡 제 10번’이라는 별칭을 갖기도 했다.

 

교향곡 9번 ‘합창’ 초연 무대, 거의 귀가 들리지 않게 된 베토벤은 지휘봉을 들고 무대에 올랐다.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던 그는 마음과 눈빛으로 오케스트라 단원들 그리고 솔로이스트와 합창단과 교감하며 지휘를 하였다. 연주는 대성공이었으나 연주를 마치고도 베토벤은 빈 시민의 열광적 환호를 듣지 못했다. 필자는 여러 번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의 연주에 참여했는데 매 번 온 몸이 전기에 감전되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지금도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연말에는 세계 각지에서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이 연주된다. 예술에 대한 열정과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작곡을 하였던 베토벤의 영혼의 메시지를 듣고 용기를 얻기 위함이리라.

 

그의 유서는 그의 생전에 공개되지 않았고 사후 그의 유품 가운데서 발견되었다. 결과적으로 베토벤은 죽으려고 유서를 쓴 게 아니라 죽움의 공포를 딛고 일어서기 위한 혁명적인 ‘자기 선언‘으로 유서를 쓴 것이 되었다. 사람은 각각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몸의 장애가 있다. 하지만 장애가 그 장애 자체로서 머물러 있는다면 그건 좌절이요 실패가 될 것이나 그 장애로 인하여 더욱 위대한 일을 이룩해 낼 수 있는 게 또한 인간이다. 2020년도 저물어가는 12월이다. 한 해 동안 기쁜 소식보다는 우울한 소식이 더 많았던 것 같다. 하나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하여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스피노자처럼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갈 희망을 놓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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